요시다 시게루(吉田 茂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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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19-07-10 10:4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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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로 인해서 1916년 10월 요시다는 귀국명령을 받고 11월에는 日本 으로 돌아왔다. 그 때 오오쿠마 내각의 對china(중국) 21개조 요구에 혼자 반대했다. 1912년 4월 그는 본국 대기명령을 받고 가족과 함께 6월 도쿄로 돌아왔다. 1912년(다이쇼 원년)에 요시다는 조선총감부 서기관에 임명되었다. 그는 안동에 9월에야 도착해 1916년 10월까지 약 4년간 근무했다. 이때 이미 메이지 천황은 병상에 누워 있었다. 또한 이것이 불씨가 되어 워싱턴 근무 명령을 받고 준비하던 중 발령이 취소되고 임시사무를 보게 되는 등 1917년 귀국 후 요시다는 좌천되었다. 그러던 중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…(skip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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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 내각은 일개 영사의 의견을 무시했고, china(중국) 에 강요해 국제여론의 반발을 초래했다. 그는 china(중국) 근무를 통해 실무적으로 많은 것을 습득한 것은 사실이나. 반면에 반드시 순탄하게 출세가도를 달렸다고는 할 수 없다.
1908년 11월에 도쿄에 잠시 돌아와 있는 사이에 그는 외무성으로부터 런던 근무를 명령받고 근무를 하였고 1909년12월에는 대사관 3등 서기관에 임명돼 이탈리아 근무를 했다.
설명
순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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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1) 요시다의 성장과정
(2) 외교관 시대
(3) 평화활동가로서의 시대
(4) 전후의 재상으로서의 시대
(5) 요시다 내각의 종결
(6) 요시다에 대한 평가
(6) 전후 日本 의 주요사건
(2) 외교관 시대
1906년 11월 영사관보로 천진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.
이듬해 7월, 요시다는 외무성 문서과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는데 이 직책은 요시다에게는 한직이었다. 그런데 외무성안에서 출세가도를 걷는 데는 china(중국) 보다도 서구 근무가 훨씬 유리했다. china(중국) 은 日本 외교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. 이 때부터 1928년 봉천 총영사직을 마치고 日本 에 귀국할 때까지 약 20년간에 걸쳐 해외생활의 대부분을 china(중국) 각지에서 영사와 총영사로 지냈으며, 그 사이사이에 불과 몇 년간을 이탈리아, 영국, 프랑스에서 보냈다.
안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대면해 있는 만주의 입구로 日本 의 대륙진출에 정치, 경제,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. 이윽고 그가 7월 30일에 죽자 연호가 메이지에서 다이쇼로 바뀌었고 요시다는 안동에 영사근무 발령을 받았다.